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스터 A. 아서 (문단 편집) == 한국과의 관계 == [[파일:external/www.koreadaily.com/120354437.jpg]] [[보빙사]] 일행을 접견하는 아서. 미국에서는 그리 지명도가 높은 대통령이 아니지만,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바로 '''조선의 외교 사절을 최초로 접견한 [[미국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다음 해인 1883년 [[고종(대한제국)|고종]]이 파견한 [[보빙사]] 단장 [[민영익]] 일행이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 호텔(Fifth Avenue Hotel)에서 아서와 만난 것. 이때 보빙사는 위 그림처럼 일국의 왕을 대하는 방식으로 아서에게 큰 절을 올렸고 고종의 친서를 전했는데, 이때 아서는 이 생소한 인사법을 접하고서는 매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멀뚱멀뚱 서 있었다고 한다. 당시 보빙사 일행도 서양 예법에서 대통령에게 절을 하진 않는단건 알고 있었는데,[* 일본을 거치고 미 대륙을 횡단하여 뉴욕까지 도달했을 정도면 정황상 이미 서양의 예법에 대해 대략적으로 파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인사해야 대통령 의전에 걸맞는 적절한 예절인지 논의하던 도중 아서 대통령이 예정보다 일찍 오는 바람에 [[조건반사]] 적으로 왕에게 하듯이 절을 했다고 한다.[[http://sf.koreatimes.com/article/20190917/1269389|#]] 다만 당대의 여러 언론을 비교한 결과, 이것이 아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일어난 반사적인 일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http://dylanzhai.egloos.com/m/3309614|#1]], [[https://arca.live/b/dogdrip/11892431|#2]]). 오히려 조선 예법식으로 한 독립국의 수장에게 보이는 최고의 경의를 나타내자는 의미에서 행해진 일이었으며, 후에 통역관인 [[퍼시벌 로웰]][* [[화성]] [[운하]]설 떡밥과 [[명왕성]] 발견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유명한 그 사람 맞다.]이 이를 전하자, 당시의 언론들이 이것에 대해 나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대통령 자신도 이에 대해 만족했다고 한다. >사신 민영익, 홍영식 등은 [[미국|대아미리가(大亞美里加: America의 음차) 합중국]] [[미국 대통령|대백리새천덕]](大伯理璽天德: The President의 [[음차]])께 아뢰옵니다. 사신 등이 대조선국 대군주 명을 받자와 대신으로 [[미국 대통령|대백리새천덕]]과 [[미국|대아미리가 합중국]] 모든 인민이 한 가지로 안녕을 누리시기 청하오며, 두 나라 인민이 서로 사귀고 우의를 돈독히 하기를 바라나이다. 그리고 친서를 전해 받자 아서는 보빙사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미합중국]]은 과거 역사에서 보듯이 타국의 영토를 점령, 지배할 의도가 없습니다. 오로지 상호 우호관계와 교역을 통해 이익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아서의 발언은 조선 정부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사실 미국은 독립 이후에 [[아메리카 원주민|원주민]]을 무력으로 학살하고 외딴 오지로 내몰아 그 땅을 대거 강탈한 후 백인 이민자들을 정착시킨 나라이고[* 이러한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과 추방은 미국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독립한 북중남미 나라들 대부분이 그랬다. 그나마,[[파라과이]]는 [[3국 동맹 전쟁]]에서 대패했고 무리하게 병력을 동원한 탓에 자국 남자들이 마구 죽어나가고 [[노예]]로 끌려가서 여자가 10명이면 남자가 2명도 남지 않을 정도로 인구가 막장으로 추락해서 그야말로 멸망 위기였기에 다급해서 차별받던 원주민들까지도 자국민으로 우대하고 혼혈이라도 맺게하면서 탄압이 줄어들었다. 워낙 급해서 심지어, 파라과이로 와서 일하던 [[쿨리|인도인 외노자]]까지도 남아서 살아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1840년대 멕시코에 속해 있던 서남 지역의 영토를 [[미국-멕시코 전쟁|강탈했으므로]] '타국의 영토를 점령, 지배할 의도가 없다'라는 아서의 말은 엄밀히 따지면 틀렸고, 멀리 갈것도 없이 불과 십몇년 전 미국이 [[신미양요]]를 일으키는 것을 지켜본 조선인 사절들도 미국의 탐욕스러움과 이기심을 모를리가 없었으나, 애당초 보빙사의 미국 방문의 의도는 항의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당시엔 그런 사실과는 상관없이 아서의 발언이 조선 정부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한편 아서 대통령과 보빙사의 만남 때는 [[통역]] 과정이 참 복잡했다. [[한국어|조선어]]-[[영어]]의 '''직접 통역이 가능한 사람이 없어서''' 아서가 영어로 말하면 [[중국어]]-영어 통역이 중국어로 옮기고, 중국어-조선어 통역이 조선어로 옮기는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며, 통역에 만전을 기하기 위한 조치였는지 [[일본어]]-영어 통역과 일본어-조선어 통역을 따로 두어 이 통역도 활용했다고 한다. [[http://www.princeton.edu/~collcutt/doc/HanSop_English.pdf|여기서]] 확인하도록 하자. 이 점에서 그는 미국에서보다 한국에서 그나마 더 기억되는 대통령이라 봐도 될 것이다. 미국 교과서에는 이름이 언급되는 일이 드문데, 한국 교과서에서는 보빙사 때문에 한번은 언급되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